서브이미지

풍경소리

어느 손 이야기

그는 참으로 부지런한 손이었습니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습니다. 봄이 오면 들에 나가 밭을 매고, 가을이 오면 논에 나가 추수를 하였습니다. 추수하다가 낫에 손가락을 배어 피를 흘리면 상처는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상처에 새살이 돋고 굳은살이 박히면 그는 그런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웠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손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는 믿음과 긍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손의 그러한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수몰된 고향을 떠나 강원도 어느 탄광촌의 막장 광원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지하 7백 미터 지점에서 다시 수평으로 1천 미터 정도 이동한 어느 한 지점의 막장에서 일하는 그는 늘 탄 캐는 일이 힘들고 피곤했습니다. 농사일에 비하면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무와 꽃들이 사는 땅 위에서 일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참으로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하루는 몸살 감기 때문인지 집에 돌아오자 그는 몹시 피곤했습니다. 뜨뜻한 구들목에 자신을 집어넣고 추위와 노동에 시달린 몸과 마음을 마냥 쉬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엌으로 내려가 솥에 끓여놓은 뜨거운 물을 한 대야 퍼서 발을 씻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사실 늘 발을 씻겨온 그로서는 발을 씻기는 일이 뭐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발을 씻기면 자연히 자신도 깨끗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단 한번도 발을 씻기는 일을 싫어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는 꼼짝도 하기 싫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닿는 것조차 싫고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발을 씻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는 하얗고 깨끗한 발을 씻기다가 문득 발이 밉살스러워졌습니다. 시커멓게 탄가루가 묻을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 그가 일을 하지 않은 허연 발까지 씻겨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피곤한 가운데서 정성껏 씻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고마운 줄 모르고 쿨쿨 잠만 자는 발을 보자 몹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나는 왜 항상 발을 씻겨주어야 하지? 발이 나를 씻겨주면 안 되나?

그는 왜 자신이 늘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은 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잖아. 항상 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잖아.

잠이 오지 않는 가운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는 생각할수록 늘 자신의 융숭한 대접만 받고 주인 노릇까지 하려고 드는 발이 섭섭하다 못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발의 하인이 아니야. 난 나야. 내일부터 난 발을 위해 살지는 않을 거야.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그는 발을 위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갱차를 타고 지하 막장으로 가서 일일이 자신의 힘으로 곡괭이질을 해서 탄을 캔 뒤,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금도 쉴틈없이 또 발을 씻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자신이 몹시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이 오직 발을 위해서만 사는 것 같아 몹시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는 몇날 며칠 곰곰 생각하다가 일부러 갱목 사이에 자신을 처박아버렸습니다. 당장 손등이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피멍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픔이 엄습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발도 어쩌지 못하겠지. 이제 발을 위해 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은근히 그렇게 된 자신이 좋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앓아 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끝에 상처를 속으로 덧나게 만들어 한 일주일간 더 오래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앓아 누워 있는 동안 그가 알게 된 것은 상처의 고통보다는 게으름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게으름은 그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는 그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숟가락을 드는 일조차 싫어할 정도로 게을러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어쩌다가 겨우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손이 게을러지자 발도 적당히 게을러지고 있었습니다. 어디 크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발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기 일쑤였습니다. 손은 그런 발을 보자 몹시 속이 상했습니다.

하루는 오른손이 왼손을 보고 말했습니다.

“왼손아, 우리가 왜 발을 위해서 살아야 하니? 난 저 발이 미워 죽겠어.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냥 이해해. 우린 누구를 위하든 위하면서 살도록 태어났어. 그게 우리의 숙명이야.”

왼손은 갱목에 다친 상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오른손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니야, 난 이제 발을 위해 살 수는 없어. 난 발의 하인이 아니야. 난 그동안 쥐가 나면 문질러주고, 더러우면 씻어주고, 발톱이 길게 자라면 깎아주고, 발가락이 아프면 열심히 약을 발라주었어. 그런데 발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그동안 내가 너무 어리석었던 거야.”

“네가 어리석은 게 아니야. 우리들의 사랑에는 그런 맹목성이 필요한 거야.”

왼손과 오른손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발은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짓만 하고 있었습니다.

“발아, 넌 왜 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니?”

화가 난 오른손이 참으로 섭섭하다는 눈초리로 발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발은 여전히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멀뚱한 눈으로 손을 한번 힐끔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오른손은 발의 그런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미움의 칼날이 시퍼렇게 곤두섰습니다. 언제까지나 발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 아예 지금 발을 없애버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 막장에서 야간 근무를 할 때였습니다. 오른손은 탄을 캐던 곡괭이로 왼손 몰래 발을 힘껏 찍어버렸습니다. 순간, 손은 일찍이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통증에 몸부림치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건 서로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발의 고통이 결국 자신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손이 미처 알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정호승 / 항아리 – 어른이 읽는 동화)

작성자항아리

작성일2002.10.30

항아리

| 2002.10.31

수정하기 삭제하기

여러분들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한 짝뿐이라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비익조(比翼鳥)라는 새로 태어난 나는 불행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날개 하나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저 알에서 부화해서 눈부신 세상의 공기를 맛보는 기쁨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엄마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부지런히 받아먹는 재미에 빠져 내가 날개가 한 짝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차차 시간이 지나고 날기를 배워야 할 때쯤 되어서야 나는 내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날기 위하여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수없이 둥지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날지 못하는 새는 새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정도 고통쯤은 어디까지나 날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둥지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날개가 한 짝뿐이기 때문에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날 수가 없어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보자 뜻밖에도 날개가 한 짝밖에 없었습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균형을 잡을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날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왜 내 날개가 하나뿐이지? 왜 하나뿐이야?”
나는 놀란 목소리로 엄마한테 물었습니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놀라지 말아라. 봐라. 이 엄마도 날개가 하나뿐이다.”

엄마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 천천히 몸을 움직여 당신의 하나뿐인 날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엄마의 날개도 정말 하나뿐이었습니다. 내가 왼쪽 날개 하나뿐인 데 비해 엄마는 오른쪽 날개 하나뿐이었습니다.

“엄마……”
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엄마를 쳐다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껏 하늘을 나는 엄마가 날개가 하나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사는 새들은 모두 날개가 하나뿐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엄마, 날개가 하나뿐인데 어떻게 날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날개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날 수가 없잖아요?”

나는 엄마가 날개가 하나이면서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엄마가 어른이기 때문이다. 너도 어른이 되면 날개가 하나라도 얼마든지 날 수 있다. 그러니까 날기 위해서는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엄마가 말하는 기다림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 기다림이 뭐예요?”
“그건, 우리를 날 수 있게 하는 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날기보다 먼저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기다림 끝에 날 수 있다.”

나는 엄마의 말씀에 적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기는 싫었지만 그날부터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둥지 안에서 늘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은 흘렀습니다.
어느 날 아침 햇살이 나를 보고 “너도 다 컸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어른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장 둥지 밖으로 나와 날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오리처럼 뒤뚱거리다가 날개가 없는 오른쪽으로 픽 쓰러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재차 시도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엄마, 어른이 되어도 날 수가 없잖아요?”
나는 원망이 가득 찬 눈길로 엄마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사랑을 한번 해보렴. 사랑을 해야 날 수가 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것같이 정신이 멍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엄마, 사랑을, 어떻게 하죠?”
“네가 직접 한번 경험해보렴.”
“사랑을 하지 않으면 날 수 없나요?”
“그렇단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날 수 없단다. 엄마가 한 쪽 날개만으로 날 수 있는 건 바로 사랑을 하기 때문이란다.”

날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엄마가 어른이 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한테 물어보아도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만 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풀잎아, 사랑이 뭐니?”
나는 길을 가다가 풀잎에게 물었습니다. 풀잎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다가 나랑 똑같이 생긴 새 한 마리를 만나 그만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순간, 내 가슴은 떨려왔습니다.

사랑은 눈이 마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풀잎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무슨 풀잎의 이름인 줄 알았던 나 자신이 우스워 그만 픽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새도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자마자 그렇게 한동안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웃음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날기 위하여 서로 사랑을 찾아나섰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도 사랑하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날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말과는 달리 우리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서로 몸을 밀착시키고 함께 날개를 움직였으나 날기는커녕 그대로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엄마한테 대들 듯이 말했습니다.
“엄마, 사랑을 해도 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세요?”

“그건 네가 왼쪽 날개를 지닌 새를 만났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시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넌 왼쪽 날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쳐 날기 위해서는 오른쪽 날개를 지닌 새를 만나야 한다. 그러니까 왼쪽 날개를 지닌 새는 오른쪽 날개를 지닌 새를 만나야 하고, 오른쪽 날개를 지닌 새는 왼쪽 날개를 지닌 새를 만나야 한다. 그게 우리들의 만남의 불문율이다.”

아이 참, 진작 그런 말씀을 해주시지.
나는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속으로 꾹 참고 돌아섰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조용히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들아, 중요한 것은 사랑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야. 사랑을 하다 보면 자연히 원했던 삶이 이루어지는 거야.”

나는 엄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사랑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나의 첫사랑은 분명 날아야 한다는 데에 목적을 둔 사랑이었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랑은 곧 파괴되고 만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힘든 일이라고 여겨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들아, 엄마가 또 하나 빠뜨린 게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더라도 진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 다가왔는지 엄마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번에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여전히 엷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는 날 수가 없다.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나머지 하나의 날개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아, 사랑을 잃지 않도록 해라. 사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줄 생각만 해라. 그러면 자연히 사랑을 받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나머지 한쪽 날개를 얻게 된다.”

나는 엄마의 말씀을 명심했습니다. 그리고 말씀 그대로 노력하고 실천했습니다.

지금 나는 한쪽 날개만으로도 마음껏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어떻게 날 수 있었느냐고요? 그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아마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정호승 / 항아리 – 어른이 읽는 동화)

항아리

| 2002.11.06

수정하기 삭제하기

지리산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벽별들이 하나 둘 스러지고 산등성이마다 햇발이 길게 뻗치기 시작했다. 섬진강은 구례를 지나 하동쪽으로 흘러가다가 잠시 흐르기를 멈추고 고요히 지리산을 돌아보았다.

해는 어느새 천왕봉 위로 막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해는 처음엔 갓난아기의 작은 혀 같기도 하고 입술 같기도 하다가, 차차 아기의 얼굴만해지더니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섬진강은 눈이 부셨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햇살들이 몸 위로 떨어졌다. 섬진강은 바로 이 순간이 자신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 지리산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섬진강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지리산을 불러보았다.

“아들아, 지금 어디쯤 흘러가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지리산은 여전히 포근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산새소리와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어요. 이젠 어머니를 향해 흘러가게 해주세요.”
섬진강은 어린 시절처럼 높고 깊은 지리산, 그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건 안 된다. 나도 널 안아보고 싶은 마음 한량없다만, 그건 안 되는 일이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저를 다시 어머니의 품안에서 살게 해주세요. 이제 더 이상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마냥 흘러가는 삶은 살기가 싫습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요. 이제는 흐르지 않고 좀 쉬고 싶어요.”

섬진강은 이제 정말 흐르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멈추어 선 채 말했다.

“어허, 안 된다니까. 아들아, 어서 흘러가거라. 흐르는 것이 네 삶의 전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넌 네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흘러가지 않으면 안 된다. 흐르는 것이 너의 삶이고, 흐르지 않는 것은 너의 죽음이다. 흐르지 않으면 너는 썩어 죽고 만다. 네가 죽으면 다른 이들도 함께 죽게 된다. 아들아, 무엇보다도 이 점을 명심해라.”

섬진강은 잠시 할말을 잊고 햇살에 반짝이는 자신의 물결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어머니, 그러면 제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주세요.”

“그것 또한 가르쳐줄 수 없다. 흘러가보면 안다. 내가 미리 가르쳐주면 넌 참고 인내하는 삶의 진정한 기쁨을 얻지 못한다. 너의 삶은 흘러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네 스스로 삶의 비밀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어머니, 전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어요. 왜 저를 이렇게 먼 곳으로 쫓아내버리십니까?”

“난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살 수 없다. 그것이 너와 나의 숙명이다. 그러니 이제 입을 다물고 조용히 흘러가도록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지리산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섬진강이 아무리 말을 시켜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햇살에 이슬을 털고 있을 뿐이었다.

섬진강은 지리산이 야속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더 이상 안아주지 않는 지리산이 참으로 섭섭했다.

해는 성큼 천왕봉 위로 떠올라 있었다. 섬진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섬진강은 곧 흐르지 않는 강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었다. 흐르지 않음으로써 오랜만에 피곤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얼마나 잤을까. 은어 한 마리가 급히 다가와 섬진강의 잠을 깨웠다.

“섬진강아, 너 왜 흐르지 않는 거니? 너 때문에 우리 물고기들이 숨이 막혀 죽겠어. 썩는 냄새가 진동해 헤엄조차 칠 수가 없어.”
은어는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 꼬리로 섬진강의 가슴을 자꾸 쳤다.

“내가 왜 흘러가야 되는 거지?”
섬진강은 은어에게 얻어맞은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과 강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섬진강아, 흐르는 게 너의 삶이야. 그게 네 삶의 방식이야.”
“글쎄, 내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굳이 흘러갈 필요가 있을까. 난 이렇게 흐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좋아.”

은어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어떻게 하면 섬진강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넌 정말 사랑이 없구나. 이런 너를 믿고 우리는 섬진강으로 몰려들었어. 너를 믿은 우리가 바보야.”
은어는 섬진강을 믿은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섬진강은 은어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은어야, 사랑이 뭐니?”
“네가 흘러가는 것이 사랑이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바로 사랑이란 말이야.”
“그래?”

섬진강은 은어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흐르고 싶지는 않았다.

“은어야, 난 아직도 내가 왜 흘러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혹시 네가 알고 있다면 좀 가르쳐줄 수 없겠니?”
“누구나 그 이유를 알고 흐르는 게 아니야. 그냥 흐르다 보면 기쁨을 만나게 되는 거야.”
“기쁨?”
“그것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거야. 자신만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거야.”

섬진강은 두려웠지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은어가 가르쳐준 사랑과 기쁨을 조금이나마 직접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섬진강이 하동 철교 밑을 지나 ‘진월’ 이라는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차갑고 짠물이 그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넌 누구니?”
섬진강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놀라지마. 난 바다야.”
“바다라니?”
“네가 되고 싶은 삶이야.”
“내가 되고 싶은 삶?”
“그래, 난 네가 살 곳이기도 해. 넌 지금까지 바다가 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온 거야. 난 널 만나기 위해 미리 마중 나온 거고.”
“싫어. 내가 왜 바다가 되어야 해? 난 싫어.”

섬진강은 다시 지리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기는커녕 곧 바닷물과 한데 몸을 섞게 되고 말았다.

섬진강은 서서히 자기의 몸이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따스한 지리산의 정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온몸이 풀어져 없어져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거야. 나를 잃고 만 거야.”
섬진강은 사라져가는 자신을 생각하며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바다가 다정히 섬진강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면서 말했다.

“아니야. 넌 죽은 게 아니고, 나랑 하나가 된 거야.”
“싫어. 너랑 하나가 되기 싫어. 나는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
“하하, 섬진강아, 나를 잘 봐. 내 속에 바로 네가 있어. 난 네가 없으면 바다가 될 수 없어. 우리는 하나가 된 거야.”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구?”
“그럼, 원래 나도 너처럼 강물이었어. 내가 너랑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나랑 하나가 된 거야. 그러니까 지금 네가 바다를 만들고 있는 거야. 내가 바다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야.”

섬진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바다의 말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내가 지금까지 흐르는 삶을 산 것은 이렇게 바다를 만들기 위해서야.

섬진강은 그제서야 자기가 왜 흘러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지리산이 왜 그토록 자기를 냉혹하게 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은어가 말한 사랑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 어머니……

바다가 된 섬진강이 멀리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멀리 지리산이 다도해가 된 섬진강을 향해 다정히 손을 흔들었다. (항아리 / 정호승 – 어른이 읽는 동화)

Re

작성자   비밀번호